blah blah

AUDE ET EFFICE


출항 준비 중인 이지스함의 명명식이 치뤄지고 있는 진주만의 한 해군 기지.
날치같은 싱싱한 젊은 수병들의 눈들은 오로지 연단 중앙에 은별이 반짝이는 해군 장교복을 입고 앉아있는 꼬장꼬장해 보이는 한 할머니에게 쏠려있다.
카메라가 천천히 수병들 머리 꼭지 뒤편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로 이동한다. 깃발 속 문장이 확대되면서 배의 이름이자 이 할머니의 이름이기도 한 ‘HOPPER’라는 글자가 뚜렷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하단의 라틴어 문구가 영화 제목스럽게 스크린 중앙에 크게 펼쳐지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황금사자가 픽사 스탠드처럼 글자 위를 통통 튀는 것 까지는 기대하지 말라)

*****

무릇 프로그램 세계의 인물들을 소개하자면 대개 어릴 때부터 남다른 천재성, 기행 등이 일화 처럼 따라 붙어야만 한다. 가령

“난 어릴 때 혼자 앉아 거대한 성을 머리 속에 그리곤 했다. 그 성 안에는 10개의 각각
다른 가구가 배치된 20개의 방이 딸려 있었고, 난 머리 속에서 이 성의 구조와 가구 배
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 찰스 시모니 인터뷰 중 (1)

“찰스 시모니, 어릴 때부터 천재 망언” 식의 일화나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모욕 주기위해 얼렁뚱땅 프로그램 하나 만들었는데 대박 나서 대학교를 때려쳤다 정도의 기행 없이는 눈길 한 번 붙잡기 어려운게 이 바닥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 삼십 대 중반까지도 뭐 특별한게 없다. 심지어 그 흔한 대학 중퇴같은 것도 안한다.
평범한 어린 시절 보내고(물론 장애인 부친의 든든한 후원 같은 휴먼 에피소드를 살짝 덧붙일 수 있겠다) 학교 졸업하고 평범한 남자 만나 결혼하고 수학 교사로 또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꾸려간다.

그런데 이 분 갑자기 김주원, 길라임 빙의 식의 판타스틱한 일 저지르니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 발발하자 느닷없이 해군에 자원을 하게 되는데 체중 미달 문제 등 해결하고 결국 입대 허락된게 그녀 나이 고작(?) 37살 되던 해.

그나마 이오지마로 던져지거나 하진 않고 수학 실력(그녀는 예일대 최초의 여성 수학 박사 학위자였다) 등이 고려되어 하버드 대에서 진행 중이던 해군 모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호워드 에이킨(Howard H. Aiken) 밑으로 보내지면서 이 계통 영웅들 보통 개발툴  언인스톨하고 그룹웨어 열어 결재할 나이에 고작 달빛요정의 스끼다시 인생 수준 벗어나기 시작한다.

하버드 랩에서 말 그대로 듣보잡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드라마로 치면 스펙은 재벌인데 하는 짓은 개망나니에 가수라고는 하는데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 오스카스런 녀석, 에이킨이 설계했던 MARK 시리즈의 첫번째 놈인 바로 MARK-1 이었다.

길이만 17미터에 달하고 높이가 2미터가 넘는 이 기계 덩어리가 뭐하는 놈인지  몰랐지만 ( 최초의 프로그램 방식 디지털 컴퓨터라고 그럴듯하게 알려졌지만 사실 고가의 자동 계산기에 불과했다 ) 그거 이용해서 우아하게 표현하면 포탄의 탄도 계산하는 일부터 매뉴얼 작업 그리고 마크 1용 프로그램 작성하는 일까지, 사실 까놓고 말하면 온갖 시다바리 잡일을 맡아 성실히 해낸다.

그리고 이제부터 전산학 교과서에 전신 사진 등장할만한 이야기들 이어진다.

마크 1 사용 경험을 계기로 40대에 비로소 본격적인 프로그래머 세계에 뛰어든 그녀는 50년 대에 몇 편의 글들을 발표하는데 컴퓨터가 한 번에 한 줄씩 밖에 해석 못하던 당시 환경에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된 코드를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이진(binary) 코드로 만들어 주는 컴파일러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으며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A-0이라는 컴파일러를 직접 개발한다.

57년에는 B-0로 알려진 플로-매틱스(Flow-Matics)라는 프로그램을 유니백에서 구현했는데 이건 최초의 영어 데이터 처리 컴파일러였으며, 단어를 사용하는 컴퓨터 언어로도 최초였다고 한다. 플로-매틱스는 이 후 최초의 사무처리용 언어인 코볼(Cobol)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이야기. ( 이 얘기 위해서는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역사적인 47년 9월 9일. MARK-2에서 발생하는 계산 오류의 원인을 찾던 중 황당하게도 이것이 컴퓨터에 날아든 나방 때문인 것을 발견하고 그 나방 꺼내서 공책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놓고 그 밑에 이렇게 적었다. “최초로 실제의 버그가 발견되었다. (First actual case of bug being found)”

뭐 좀 더 있긴 하지만 이상이 천재와 기인으로 빼곡한 프로그래밍 세계에 살았던 그리 특별해보이지 않는 한 여성 프로그래머 이야기의 거의 전부이다.

이 얘기들 어디에도 서른 초반에 자신이 만든 CP/M의 발꼽의 때 수준도 안되는 MS-DOS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걸 속절없이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프로그래머계의 모짜르트라 불리는 게리 킬달이나, 버클리 재학 중 등록금 벌기 위해 HP 에서 일하면서 짬짬이 홈브루 클럽에서 자랑할 맘으로 만든 장난감 개선해서 후에 애플 컴퓨터를 만들어 낸 마법사 워즈니악 처럼 일찍부터 보이는 천재성 같은건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일찍은 커녕 이 분, 스티브 잡스가 CEO 로 복귀해서 수렁에 빠진 애플을 샤방샤방하게 만들 나이에, 찰스 시모니가 엑셀 대박내고 MS에서 개발 최고책임자로 떵떵거리던 나이에, 그리고 앨런 튜링이 온갖 역사적인 일들 벌여놓고 독사과 먹고 인생 하직할 나이에 펀치로 천공하는 일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방금 선언한 변수명도 IDE 도움 없으면 기억 못하는, 주목받는 새로운 언어 익히기는 고사하고 쓰던 언어의 기본 API 사용법도 네이버 지식인 없으면 막막해진 당신이 그리고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는 모 시인이 얘기한 그 부록의 나이대에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하는 당신이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살펴봐야할 롤 모델은 어쩌면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가 아닌 평범하디 평범했던 이 여인일지 누가 아랴. 응?

*****
마지막 장면.
한 낯익은 중년 여성이 사무실에 앉아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다.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는 미국 최초의 여성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고, 미 해군 소장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왜 안전하게 정박된 배에 있지 않고, 바다에서 작전하는 것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합니다. 하지만 정박해 있으라고 배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HP는 항구에 느긋하게 앉아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경쟁의 파도가 아닌 흔들림이 없는 잔잔한 물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라고 휴렛팩커드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모니터를 클로즈업했던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빠지면서 책상 앞 쪽에 있는 명패가 슬쩍 보여진다.
‘HP CEO. 칼리 피오나’(2)

다시 화면 서서히 어두워지고 다음과 같은 자막이 한 줄씩 올라온다.

호퍼는 1986년 해군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3번의 입대와 전역을 했다. 중요 과제가 있을 때마다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일한 그녀를 많은 미국인들은 ‘Amazing Grace’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한편으로 개발자들에게 그녀는 코볼의 대모(‘Grandma Cobol’)라는 닉네임으로 그리고  ‘세계 최초의 컴퓨터 버그’ 기록자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려 ACM(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에서는 매해 뛰어난 업적을 나타낸 35살 이하의 컴퓨터 전문가에게 Grace Murray Hoppper Award (3)를 시상하고있다.

그리고는 그녀의 전신 사진과 함께 ‘Grace Hopper(1906 ~ 1992)’라는 짧은 문구 하나 화면 중앙에 표시되며 상영관의 불들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4)

각주
(1) 오래 전 읽은거라 장담은 못하지만 찰스 시모니(Charles Simonyi)의 일화는 ‘Programmers At Work’(번역서 :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창시자들)에 나오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절판되어 아쉬운 책 중에 하나인데 이 책에는 게리 킬달, 레이 오지, 제프 래스킨 등 전설적인 프로그래머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2) 지금은 저문 별이긴 하지만 칼리 피오나(Carly_Fiorina)는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여성 CEO” 6년 연속 1위를 기록하기도 했던 HP 의 전 CEO로 저 글은 ‘칼리 피오리나, 힘든 선택들’에서 인용한 것이다. 글 중 그녀가 인용한 호퍼의 대답 원문은 다음과 같다.

“A ship in port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are for. Sail out to sea and do new things.”
(3) 이 상의 첫 수상자(1971년)는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으로 유명한 도널드 크누스(Donald Ervin Knuth)이다. ( 현재 이 상은 구글이 후원하고 있다 )

(4) 이미 눈치 챈 이들 많겠지만 이런 3류필 나는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첫 장면의 이지스함 명명식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영화적 장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구라’다. ( USS Hopper 라 명명된 것은 1996년이다) 그리고 이 가상 영화의 제목인 ‘AUDE ET EFFICE’는 ‘Dare and Do’라는 의미이다. USS Hopper 수병들의 모토이자 호퍼 자신이 좋아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 잘 감이 안 온다고? 그렇다면 그녀가 자주 하던 이 말이 혹 도움이 되려나?

“It’s easier to ask forgiveness than it is to get permission.“

( 아참! 라틴어 저 말은 ‘아우데 엩 에피케’라고 읽는다고 한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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